이 나라는 예약 기다리다가 '앓느니 죽지' 싶은 때가 많다. 당장 이가 아파죽겠어서 치과에 전화하면 한 달, 혹은 의사가 바캉스라도 갈라치면 두 달 후에 오라고 날짜를 준다. 가장 황당했던 경우는 심장이 며칠동안 비정상적으로 뛰길래 심장의를 보려고 전화를 해서 '급하게 보고 싶다' 상황을 설명했건만은 한 달 후에야 예약이 빈다는 답을 들었던 적이 있다. 예미... 앓느니 죽지! 그렇게 기다렸다간 한 달 후에 의사가 아닌 장의사를 보겠다!!!!! 융통성 한치도없는 이들의 냉정함에는 학을 뗀다. 학을 떼. 참고로, 이렇게 미어터지게 예약이 몰리지 않는 의사도 많이 있기는 하다. 다만 진료비를 비싸게 받기 때문에 국가보험으로는 환불이 다 안 된다.
파리에 열흘 먼저 도착해서 마누라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신랑이 여기저기 알아본 덕분에 오자마자 며칠만에 곧 산부인과 의사를 볼 수 있었다. 11월 2일, 수요일 오후 4시45분.
신랑과 함께 여의사가 맞는 클리닉을 찾았다.
의사: "임신이 확실해요?"
나: "예, 소변검사로 테스트했고, 초음파로도 태아를 확인했어요. 한국에서 찍어온 초음파 사진이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의사: "한국에서 해온 검사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 (어절씨구리???? 니가 나를 웃겼어?! 더구나 유니세프에서 '아이에게 친근한 병원'으로 선정된, 한국에도 3개밖에 없는 병원 중 하나인데!!!)
마지막 월경일로 계산을 하더니 임신 8주반이랜다. 그건 모 알고 있으니 궁금했던 사실은 아닌데, 신체적으로 어떤 증상이 있느냐 묻지도 않아.. 질문이 있느냐고 시간을 주지도 않아... 내게 말할 기회는 한순간도 주지않고 종이에 연신 적어가면서 혼자 열심히 떠들어댄다. 그다지 귀담아 듣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의사: "복용하는 약이 있나요? 집안에 큰병을 앓은 사람은? 수술한 적 있나요? 임신이 이번이 처음이신가요? 위아래도리 벗고 저기 진료대에 누우세요. (갑자기 뒤돌아 인터폰을 받더니) 2층이에요!"
스케줄 받아주는 비서는 같은 건물에 없고, 클리닉은 일반 아파트에 위치해 있고, 접수가 따로 없기 때문에 환자가 올 때마다 의사가 인터폰에 일일이 응답하고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정신사나운 가운데..나, "저기.. 결혼 전에 신체검사 결과를 혹시 몰라서 갖고 왔는데, 보시겠어요?"
프랑스에서 결혼할 때 필요한 서류 중 하나로 '결혼을 위한 신체검진'이 있다. 피검사, 소변검사 등 신랑 신부 의무적으로 다 하는데, 특히 여자쪽 검사항목이 많다. 임산부와 태아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의사: "그것도 한국에서 한 건가요?"
신랑과 나: "아니요. 프랑스에서 한거에요"
나: (아... 이 의사 진짜 밥맛없네)
의사: "언제 한 결과죠?"
신랑과 나: "지난 5월이요."
의사: "보여주세요. 그리고 마담은 진료대로 가서 옷을 벗고 누우세요."
서울에서 한번 해봤던거라 어떻게 해야하는 지는 알겠는데, 진료대 주변에 가리개 커텐도 없고, 걍 60cm 폭의 가림판 하나 있는데, 진료대를 다 가리지도 못하고, 하체를 가릴만한 간이치마도 없고. 아무리 진료실 내에 의사하고 신랑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뭐하자는거냐? 시설은 서울보다 꼬져가지구... 택택거리기는.
우선 체중을 재고, 진료대에 누웠다. 의사가 양쪽 가슴을 원형으로 누르며 만져본다.
나: (유방암 검사를 하려나?)
의사: "체중은 늘지 않았지만 가슴이 부풀었군요"
이번엔 다리를 벌리고 눕자 뭔가 찬 금속같은 것을 질 안으로 넣더니 뭔가를 긁는 것 같다. 기분 안 좋았다. 곧이어 한 손을 불쑥 집어넣으며 누르더니 다른 한 손으로는 하복부 여기저기를 눌러댄다. 기분 점점 안 좋아진다. "뭐 하는 거야 대체?!!!" 맘같아서는 꽥!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자....
의사: "(한가운데 하복부에 내 손을 갖다대면서) 뭔가 오렌지만한 딱딱한 것이 만져지죠? 그게 태반입니다. 이제 내려와서 옷 입으세요."
신비하고 경이롭기는 커녕 푸줏간 도마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한 점의 벌건 고깃덩어리가 된 기분이었다.도마에서 내려와 주섬주섬 껍데기를 줏어 챙겼다. 서울에서 본 의사는 환자를 대하는 손길이 이렇게 터프하지 않았었다.
의사: "무엇보다 분만실 예약을 빨리 넣으셔야 합니다. 매달 혈액검사를 합시다. 혈액검사는 되는대로 빨리 하시구요. 초음파는 12주가 되서 찍으니까 이달 말에 찍으시구요. 한 달 후에 다시 볼 때 두 검사결과를 갖고 오세요."
나: "네"
혈액검사나 초음파검사는 의사가 직접 하지않고 검사만 전문적으로 하는 lab에서 담당한다. 의사의 진단서가 필요하며, 검사결과가 나오면 그걸 갖고 다시 의사를 찾아가 상담한다. 하지만, 한 달 후에 내, 당신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진료비로 27유로. 한화로 하면 32,500원. 일단은 내지만 보험으로 전액환불이 될 돈이다.
클리닉을 나와 승강기 문을 닫으면서 신랑이 중얼거린다.
"여긴 병원이 아니라 공장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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