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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varde 잡담

프랑스에서 정규직, 그리고 실직

사람과 사람,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다

내가 정규직으로 하던 일을 그만두던 날, 아쉽다며 나를 보러 온 프랑스 손님이 셋 있었다. 중년의 커플과 노년의 신사분. 그중에 한 분이 날 울 뻔하게 만들었다. 내가 없어도 싹싹한 동료들이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안 똑같아요 (C'est pas pareil.)"라고 답해서 나에게 감동을 먹이셨던 분. 문득 "안 똑같아요"라는 그 분의 말이 떠올라 마음이 짠하다. 생각해보니 오늘이 화요일, 그 커플이 정기적으로 나타나던 요일이다. 불어에 '정'이라는 단어가 없을 뿐이지 정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하긴 어떻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이 없을 수 있겠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가 그 정규직을 그만둘 수 있을 꺼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이 좋거나 동료들이 좋아서가 절대 아니었고, 벌이가 짭짤해서도 아니었다. 한국 입양인이었던 직속상사는 내가 마지막까지 일하는 주까지도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으니까. 정규직에 따른 재성상의 안정성, 건강보험, 유급휴가 이 세 가지가 내 발목을 붙들고 있었고, 무엇보다 일터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좋았다. 내가 상대했던 손님들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의가 예의바르고,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있고, 늘 미소를 머금는, 한 마디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갓난아기부터 임산부, 중년남성,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난 그들과 이야기하는 게 좋았다. 상사들로부터 아무리 기분나쁘고 아니꼬운 꼴을 당해도 내가 끝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는 가슴으로 사람을 대하는 나의 기본적인 태도를 특별하고 감사한 것으로 여겨주었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먹여키워야 하는 사랑스런 두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일을 그만두게 된 건 더이상은 안되겠다고 분해서,라기보다 내 얘기를 듣던 두 동양 친구가 '더이상은 참지마. 외부에 도움을 청해'라며 나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청에 가서 도움을 청했고, 시청에서 무료 법률 서비스를 알려줬다. 그 덕에 법적 용어로 5장에 걸친 편지를 작성할 수 있었다. 그 편지를 노동청에 보내라며 출력해주는데 나는 주저했다. 상사가 나를 더 못 살 게 굴지 않을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무료 법률 서비스 직원이 내게 물었다. "이미 당신은 더이상 잃을 게 없지 않느냐?" 그의 말이 맞았다. 하루가 지나면 못 부칠 것 같아서 시청을 나오자마자 바로 우체국으로 달려가 노동청에 한 부, 상사에게 한 부 등기우편으로 부쳤다. 바로 다음 날, 등기우편을 받은 상사는 노동계약을 좋게 좋게 마무리하자고 나왔고, 내게 -쥐꼬리만한- 밀린 페이도 주겠다고 순순이 나왔다. 양자합의 하에 노동계약 해지를 위한 행정처리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나 또한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둘 있었고, 그 프로젝트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었기 때문에 타이밍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4월 23일 화요일, 직장을 나왔고, 4월 28일 일요일 한국에 갔으며, 2주 동안 딸과 친구처럼 신나게 한국을 여행했고, 어제까지 피터지게 글을 써서 내 불어 블로그에 올렸고, 나의 시간을 음미하면서 내 프로젝트에 몸을 담그고 있다. 아, 달콤한 실직의 시간이여! 앞으로 다시는 월급쟁이가 되지 않겠다. 내가 월급을 주는 상황이 되면 내가 바라는 상사가 되서 '당신은 멋진 사람(들)과 일하고 있는 멋진 사람이에요'라는 인상을 매일매일 심어주는 멋진 메니저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내게 밥 사주고, 노잣돈 쥐어준 친구들, 잘 들어. 다음 번 한국행에서는 내가 밥 사주고 선물줄꺼야!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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