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rance 프랑스

자유롭고 복잡다단한 인간의 결합

어제 저녁 한 친구('한국인'이라는 별다른 언급이 없으면 이 글에 출연하는 인물은 모두 프랑스인이다)가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쥐며 찾아왔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너는 내 인생의 남자'라며 결혼을 꿈꾸게 하던 여자가 불현듯 떠났다는 것이다. 그녀가 전애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1살짜리 아기를 친자식처럼 젖병 물리고 기저귀 갈아주며 키운 지 1년, '우리 사이엔 열정이 없다'는 이유를 대며 그녀는 짐을 싸서 아기를 안고 나가버렸다는데, 그것도 전애인의 아파트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랑스에서는 독실한 크리스챤이 아닌 이상 동거가 보편화되어 있다. 6개월 연애하다가 동거에 들어가면 5년 정도 살다가 결혼에 골인하기도 하고, 15년을 같이 살았어도 헤어지기도 한다. 결혼을 했다가도 이혼하고, 이혼하면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아이 딸린 남녀가 만나 새 아이를 갖거나, 친부와 친모가 각각 따로 재혼해서 자식을 가지면 복잡한 가계를 그리게된다. 배우자를 동성애인에게 빼앗기는 경우도 간혹 봤는데, 화가 나기앞서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대학교수 R(59살)은 정신치료사인 S(61살)와 동거를 20년째 하다가 결혼한 케이스. 둘 다 이혼의 아픔이 있어서 결혼이란 걸 굳이 하고싶은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결혼서류 이후로 전보다 세금혜택을 더 받게 되었을 뿐 삶 자체에서 결혼 전이나 후나 변한 건 하나도 없다고.

프랑스인의 평균 결혼연령은 남자 만30.6살, 여자 만28.6살이며, 연애는 고등학교 때부터 여러 번 하지만 동거를 하는 사이는 심각한 사이다. 하지만 '동거=결혼'은 아니다. 주변에 보면 결혼 전 보통 1-2회 정도의 동거를 경험하는 것 같다. 동거를 그렇게 하고 결혼을 해도 이혼율이 50%(2001년 통계)에 이른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성과 살아본 경험이 있으면 결혼생활이 원만할 것 같은데,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사귄 대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히려 인생의 반려자를 고르지 못해 이 사람 저 사람, 정처없이 시간허비 마음고생하는 프랑스인들을 여러 명 보면서 아쉬울 때가 많았다.

이혼이 굳이 아니더라도 연인과 헤어지는 슬픔은 말할 수 없이 큰데, 이혼 후 법정에서 서류가 통과되는 2-3년을 기다리며 아픈 기억을 되새김한다는 건 고문이다. 그 시간동안 재고를 하라는 배려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여기서 본 바로는 이혼수속 기간동안 재고는 커녕 새로운 연인을 만나러 다닌다. 결혼한 커플의 반이 이혼하는데, 헤어지는 속사정이야 모르겠지만 4쌍 중 3쌍이 여자측에서 이혼신청을 하고, 이혼하는 커플의 98%는 남자가 여자에게 생활비를 주도록 판결이 내려진다. 결혼에 대한 불안감과 이혼에 대한 두려움으로 프랑스인들은 결혼을 점점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고, 결혼연령도 점점 늦춰지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특히 1999년말, PACS(빡스)라는 동거계약법안이 통과된 후로 PACS커플은 해가 갈수록 느는 반면, 결혼율은 줄어들고 있다. PACS란 Pacte de civil solidarité의 준말로 해석을 하자면 '시민연대조약'이란 뜻이다. 커플 상호간에 부여되는 권리와 의무가 결혼보다 훨씬 적고, 맺고 끊는 절차가 훨씬 간편해서, 헤어질 경우에도 해당 관청에 '이제 조약 끝!'이라는 신고로 충분하며 수속은 몇 달 내로 처리된다. 위자료가 없고, 만일 태어난 아이가 있을 경우, 친자방문권을 주장할 수 없다. 아이는 애초에 PACS에서 쌍방이 결정한대로한다. 아이는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지만 결혼해서 낳은 자식의 상속권에 비하면 절반밖에 안된다. 입양을 할 경우, 친권 및 상속권에서 매우 까다로운 문제가 발생하므로 PACS에서 입양은 허용되지 않는다.

PACS의 필요조건은 적어도 한 사람은 프랑스 국적을 가질 것, 한 사람이라도 결혼이나 다른 PACS를 한 상태가 아닐 것, 두 사람이 다 성인이며, 4촌이내 관계가 아닐 것 등이다. 결혼보다 얽어매는 관계가 덜하다고 헤어지지 않는 건 결코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PACS를 하는 10쌍 중 1쌍이 헤어진다고 한다. 실례를 보자.

31살의 미혼남 T는 한국인 N과 사귀다가 처음으로 동거를 시작했다. N과는 달리 T는 결혼도 아이도 원치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지내자고 원치않는 학생신분으로 타지에서 계속 체류할 수가 없자 N의 체류증과 노동허가증 문제때문에 동거 2년만에야 기어이 PACS를 했다. 하지만 이미 N은 기다리다 지친 상태. PACS 후 노동비자가 나온 지 얼마 안되서 둘은 별거를 했고, 1년 뒤 헤어졌다. 프랑스인 T는 수 년 간 동거생활이 원만하면 그때가서 PACS를 고려하고자 했을 것이다. 실제로 내 주변에 보면 PACS하는 커플은 없다. 동거 중이거나 동거하다 헤어졌거나 동거하면서 결혼을 준비하는 커플들만 있다. 반면에 한국인 N은 타지에서 외국인과 함께 사는데있어서 적어도 어떠한 법적 장치 안에서 안도감을 얻고자 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사랑하는 방식과 동거에 대한 개념이 문화적으로 상이하게 달랐던데서 온 아픔이었다고 본다.

PACS의 필요조건을 다시보면 대상에 성별의 구분이 없다. 즉 동성애자들도 PACS가 가능하다. 커플의 법적인 결합장치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한 동성커플이 결혼을 시도했다. 다음 날로 주례를 섰던 시장은 해임되었고, 1년 후인 지난 4월, 법원은 '이 결혼무효!' 판결을 내렸다. (참고로 프랑스에는 예식장이 없으며, 시청이나 관할관청에서 청장의 주례로 결혼식이 치뤄진다. 주례사는 없으며, 가까운 친지와 결혼증인 앞에서 부부의 권리와 의무조항을 청장이 읽어준 후, 서식에 사인을 하면 식은 끝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5분! 종교적인 혼례은 이후에 할 수도 있으며, 안 해도 상관없다. 다시 말해서, 법의 이름으로 하나되는 혼례는 의무요, 신의 이름으로 하나되는 혼례는 선택이다.)

세계적인 프랑스 철학가 쟈끄 데리다가 르몽드지와 가진 인터뷰에 의하면(자세한 기사는 르몽드 2004년 8월 19일자, 한겨레 8월 20일자 참고), '결혼이란 단어와 개념을 아예 민법에서 없애고 자유로운 시민결합(union civil)이란 단어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프랑스의 가족개념이 앞으로 얼마나 더 다양하고 폭넓게 변할 지 지켜봐야 할 일이다. 난 사실 걱정된다. 머리큰 어른들이야 사랑찾아 자유로운 시민결합 한다지만 부모의 이혼만으로도 정신적으로 충격일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엄마애인/아빠애인, 새엄마/새아빠, 편모/편부, 두 엄마/두 아빠를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단 말인가?


필자가 <샘터> 2005년 6월호 '해외통신'(pp.96-97)에 기고한 글의 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