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결혼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다 혼혈아라 부르는건 아니다. 서로 다른 인종의 부모를 둔 아이를 혼혈아라고 부른다. 따라서 부모의 국적이 같아도 그 아이를 혼혈아라 부를 수 있고, 부모의 국적이 달라도 혼혈아라 부르지 않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 한국입양인과 프랑스 백인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부모가 둘 다 프랑스인이지만 아이는 혼혈아이고, 미국인과 룩셈부르크인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부모의 국적과 대륙이 다르지만 혼혈아라 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혼혈아라고 하지 않는다. 이미 조상세대에서 몇 번 섞인 피, 혼혈이라 할 것이 없지 않은가? 반대로 같은 인종이어도 한국인과 동남아인 사이에서 낳은 자녀는 혼혈아라고 부른다. 이렇게 되면 '혼혈아'에 대한 개념이 조금 혼동이 온다. 아따, 이렇게 서론을 늘어놓고 보니 제목을 '혼혈아의 언어교육'이 아니라 '국제커플 자녀의 언어교육'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제목을 바꾸자.
혼혈아에 대한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국제결혼으로 아이를 낳은 부모는 거치지 않을 수 없는 큰 고민 중 하나를 토로해보자.아이가 한 살 지나 처음 했던 단어들은 '엄마/아빠/아~ 예뻐'를 비롯해서 다 한국어였다. 내가 스물네시간 끼고 살면서 한국어를 하니 당연히 아이가 하는 말은 한국어겠지?아빠가 하는 불어도 이해는 하지만 하는 말은 한국어였다. 예를 들어, 어휘가 늘기 한참 전이었는데, 불어책이든 한국어책이든 같은 imagier(단어공부하는 그림책)를 갖고 엄마는 한국어로, 아빠는 불어로 읽어줬다. '불가사리 어딨어?'를 해도, 'Ou est l'etoile de mer?'를 해도 아이는 단어를 발음하지는 못해도 불가사리 그림을 정확히 집어냈다.
아이가 한 살을 넘기고 내가 북경에 일주일, 뉴욕에 열흘을 혼자 다녀와야할 일이 생겼을 때, 시어머니가 오셔서 아이를 맡아주셨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이의 불어가 눈에 띄게 늘어있었다. 신기한건, 시어머니 말에 의하면서 내가 없을 때는 한국어를 한 마디도 안 하다가 내가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한국어 단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는거다. 시어머니가 놀라서 "나하고 있을 때는 한국말 하나도 안 하더니???" 그 이후로도 여러 번 관찰에 의해 얻은 결론은, 아이는 상대방이 한국어를 알아듣는지, 불어를 알아듣는지를 제대로 구분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현재 아이는 나한테는 한국어도 불어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로도- 지 내키는대로 말하는 반면에, 아빠한테는 불어만 한다. 아빠가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아이가 한국말 못 알아듣는 아빠에게 통역(?!)을 해주기도 한다. 하루는 한국어 동요테입를 듣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빠에게 'poussin poussin' 이라고 하더란다. 그때 흘러나왔던 동요가 뭐였는지 다시 틀어보니까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세요, 병아리떼 쫑쫑쫑 놀고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였다. poussin은 불어로 '병아리'다.
국제커플 자녀들은 2개국어를 하려니 또래보다 말이 늦다. 결혼식장에서 만났던 한 국제커플은 첫아이가 만 4살이 되서야 말을 하기 시작했다면서 당시 임신 중이었던 내게 '아이가 말을 늦게 하더라도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애는 다행히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시기에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현재 또래 아이들은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하는데 반해 우리 아이는 아직은 그 수준이 아니다. 말을 할 줄 알면서도 집밖에 나가면 말을 한 마디도 안 한다. 나, 애 아빠, 시어머니, 그리고 자기가 마음이 편한 사람, 편한 장소에서만 말을 한다.
울애가 또래나 6살 된 어린이를 만나 놀 때보면, 한참동안은 말 한 마디 안 하고 논다. 그러다가 상대 아이가 자기가 잘 놀아주면 어느 순간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신기한 건, 상대 아이가 불어를 하는 아이면 불어로 하고, 상대 아이가 한국어를 하면 울애도 한국어로 한다. 'moi aussi!'라고 하거나 '나두~'라고 하거나 상대방에 따라 달라진다는거다.
아이가 상대방에 따라 쓰는 언어가 달라진다는건 아이가 속한 작은 사회에서 먹혀듣는 말을 인식하고 그에따라 말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아이가 탁아소나 학교에 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프랑스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고 직장에 나가는 한국엄마가 아이와 한국어로 대화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엄마가직장을 안 다녀도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시작하면 낮시간의 절대다수를 불어로 소통하는 애를 데리고 한국어로 얘기하는데 한계가 있다. 아이의 불어 어휘 수와 어휘 수준은 점점 높아져가는 반면에 엄마와 집에서 하는 한국어의 어휘 수와 어휘 수준은 그다지 발전되지 않는다는거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한국엄마에게 아이가 불어로 대답을 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왜? 아이는 엄마가 불어를 잘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때로는 엄마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불어로 다시 말해달라고 하기도 한댄다.
매주 수요일 오후, 프랑스 학교는 문을 닫는다. 여가활동 등을 하는데, 많은 한국엄마들이 자녀들을 한글학교에 보낸다. 백인 하나 없이 한국인 피가 섞인 -또는 한국인 피가 100%인- 아이들과 100%로 만나서 노는 시간이다.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느냐?고 물어보니 한글학교 수업은 한국어로 진행되는데 아이들이 지들끼리 놀고 얘기할 때는 불어로 하니 '별로' 안 는댄다. ㅠㅠ
그럼 엄마인 나는? 집밖에 아이를 데리고 나갔을 때, 불어로 하나 한국어로 하나 갈등할 때가 있다. 아이에게 칭찬을 하고, 야단을 칠 때, 불어로 하나 한국어로 하나 갈등할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불어로 말하는게 더 명확해서 불어로 할 때가 있고, 한국어에는 없는 단어나 표현을 말해야 할 때 나도 아이에게 불어로 얘기할 때가 있다. 내가 바라는거... 아이가 더 컸을 때, 내가 한국친구들과 수다떨듯이 아이하고 한국어로 수다떨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일기와 블로그에 적은 글을 아이가 커서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가 내 일기장을 뒤적거리기를 원한다는게 아니라, -예를 들어 내 사후에라든가- 내가 쓴 수많은 글들을 내 아이가 읽어낼 수 없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한국에가서 친척들을 만났을 때, 아이가 언어장벽으로 대화를 나누지 못하면 마음이 좀 쓰릴 것이다. 그때마다 내가 옆에서 통역을 해주는 수고를 안 했으면 정말 정말 좋겠다.
아직은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아서 장애가 덜하지만 한-불 언어교육에 관한 고민은 출산 전부터 쭈욱 머리 속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로선 책, 한국어 동요 테입/CD, DVD 등으로 아이가 한국어를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국어 책을 구하지 못하면 내가 불어 책을 한국어로 읽어준다. 뿡뿡이 DVD를 허구헌날 아이에게 보여줬더니 '저러다 불어가 밀릴까' 괜한 걱정하시는 시어머니, 불어로 된 유아용 DVD를 사서 보내셨다. 한국에 전화해서 한국어 책과 시디를 구한다고 했더니 '여긴 영어교육시키느라 난린데 넌 우리말 교재를 찾느냐'이라며 웃는 이도 있다. 당신에게 영어는 외국어지만 우리 아이에게 한국어는 엄마의 모국어란 사실을 잠시 잊었군요.
프랑스에 입양된 한국인이나 한국엄마를 둔 프랑스인들이 성인이 됐을 때,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거나 한국에 가보고 싶어하거나 하다못해 한국인 친구를 두고 싶어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본다. 엄마가 한국인인데, (엄마와 늘 불어로 하느라) 한국어를 할 줄 몰라서 18살이 된 나이에 파리 한국문화원을 찾아와 한국어강좌를 수강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짠 했다.학교에 들어가 몇 년은 아이가 불어로 말하길 원해도15~18년 뒤 상황을 상상하면 한국어로 대화하도록 꾸준히 유도해야 할 것 같다. 대화 수준에 따라 어휘도 달라지는건데.. 아이 수준에 맞는 한국어 책도 계속 잊혀줘야 할 것 같다. 말은 참 쉽지만 그 노력은 한국에서 사는 엄마가 자식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영어야 마음만 먹으면 TV를 틀어도 라디오를 틀어도 영어교육 프로그램이 있고, 학원이든 교재든 쉽게 구할 수가 있지만 프랑스에서 한국어 교재는 다양하지도 않을 뿐더러 핵심은 한국어는 소수민족의 언어라는거다. 사실 그때문에 한국엄마가 프랑스 사회에서 아이와 밖에서 한국어로 얘기하는 것이영어권 엄마가 아이와 영어로만 대화하는 것만큼 당당하게 느끼지 못한다.
내가 아는 한 캐나다-프랑스 커플은 남자가 캐나다인인데 처가댁에 놀러가서 프랑스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아이들과는 반드시, 예외없이 영어로만 얘기한다고 한다. 주변에서 그들이 하는 대화를 알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에게 '아빠와는 반드시 영어로 말할 것'을 강요한단다. 근데 그는 나에게도아이에게 '꿋/꿋/하/게' 한국어로'만(!!!)' 말해야 한다면서 그건 영어여서, 한국어여서, 어떤 특정언어여서가 아니라 '엄마의/아빠의 모국어'이기 때문이라는거다.
뉴욕 체류 중에 숙소에서 만난 미국인 여성이 내게 '아이에게 어느 나라 말로 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아이와 한국어로 말한다고하자 그녀는 매우 흡족해했다. 내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아니 들어본 적도 없는 나라 태생이었는데, 그녀 설명에 의하면 러시아 옆의 작은 나라라고 한다. '그럼 슬라브계 언어냐?'라고 묻자 절대 아니라면서 자기 모국에 대한 자신감에 꽉 차있었다.미국에는 어린 나이에 이민을 와서 미국인이기도 한 그녀는그런 소수민족 태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딸도 자기의 모국어를 할 줄 알며, 자기 손녀도 그녀의 모국어를 할 줄 안다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녀도 역시 내가 꿋꿋하게 아이와는 한국어를 고집하며 대화해야 한다고 했다. 아.. 갈 길이 멀다. 손녀까지 한국말을 시키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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