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커플의 언어교육 - 유아학교와 한글학교
큰애가 유아학교(école maternelle; 3년과정)를 마치고, 9월이면 초등학생이 된다. 이제 책가방 메고 등교해서, 하교하면 숙제부터 하는 시절이 시작되는거다. 아이는 아빠 나라의 언어인 불어와 엄마 나라의 언어인 한국어를 말하고 쓰고 읽을 줄 안다. 3년 전에 연재했던 ‘국제커플의 언어교육’의 중간보고를 해야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처음 가던 한글학교
지난 해 가을, 아이를 한글학교에 데려가던 첫날, 아이가 유아학교에도 안 갖고가는 책가방을 메고 씩씩하게 걸으며 내게 던진 질문이 아직도 생생하다. « 엄마도 나만할 때 한글학교에 갔어? » 미소.
지난 9월, 만5살이었던 딸애를 처음으로 파리 한글학교에 등록시켰다. 약간 늦은 감이 있기는 했다. 집에서 한글학교까지 1시간반이나 걸리기 때문에 우선 아이가 많이 피곤해할 것 같았고, 둘째를 데리고 다녀야했기 때문에 둘째가 크기를 기다렸던게 이유였다.
나와는 늘 한국어로 말하기 때문에 일상회화는 잘 하지만 집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설명하는게 서툴렀던 지라 아이의 한국어 실력을 중간으로 보고 ‘어학당’에 배치해달라고 했다. 다른 한국 엄마들은 ‘우리 애가 뭐를 뭐를 잘해요. 한 단계 높은 반으로 배치시켜주세요.’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판에 나는 동년배의 다른 반보다 쓰기 숙제가 적고 수업의 강도가 덜한 반으로 배정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얌전하다고 소문난 애니까 한글학교에서만큼은 얌전하다는 말을 애 앞에서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까지 했다. ‘저 나이 때 애들은 명랑하고 씩씩하게 아무하고도 잘 어울려 놀아야지 얌전한게 칭찬인줄 알고 계속 얌전하기만 하면 안되니 절대 애 앞에서 ‘너 참 얌전하구나’라고 하면 그게 칭찬인줄 안다고.
어학당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는 쓰기를 배우기 시작했고, 프랑스 유아학교에서도 나오지 않던 쓰기 숙제가 매번 나왔다.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 한글을 떼야해서 집에서 한글 가르치느라 아주 힘들어 죽겠다고 한국 엄마들이 혀를 차는 그 한글쓰기를 배우다가 한국어 어렵다고 때려칠까봐 난 맘이 조마조마했다. « 숙제가 많은거 아닌가요? » ㅠㅠ 했더니 어학당 담임선생님은 동년배의 토끼반에 비하면 숙제가 반 밖에 안되는거라고 위로하셨다.
유모차를 끌고 파리 시내에 전철타고 나갔다 오는 미친 짓을 1주일에 한 번은 해야하는 내 상황은 차치하고, 4존에서 파리까지 자동차가 아닌 기차와 전철로 이동하는게 피곤하고 다리 아프다고 투덜대지는 않을까, 숙제가 많다고 하기 싫다고 하지는 않을까, 아이를 한글학교에 데려가는 첫날 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이게 왠걸? 첫날 한글학교에 갔다오더니 재밌다고, 수요일마다 여기 오겠다고 아주 신이 났다.
어학당에서 토끼반으로
‘놀멘 놀멘하면서 말이나 많이 늘어라’는 기대로 어학당에 배정을 부탁하고 돌아선 뒤 ‘아차차 ! 내가 아이의 한국어 실력을 과소평가했구나 !’라고 깨달은 건 2012년 설이 되어서였다. 그전까지도 아이가 한글학교 수업을 좋아하고 잘 따라간다는건 알고 있었다. 한번은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 한글학교에서 다른 애들은 ‘선생님~ !’라고 부른 뒤에 질문을 불어로 하는데, 나만 ‘선생님~ !’하고 부른 다음에 질문도 한국말로 해. » 아이를 대견해하면서도 다들 지 새끼가 잘난 줄 아는거려니 했는데..
평소에는 애들을 교실에 데려다주고 뿔뿔이 흩어지던 보호자들이 설 잔치 때는 다 모여 다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보모나 할머니가 데리고 왔던 아이들도 그날만큼은 하루 휴가를 얻은 엄마나 아빠가 동행했다. 어학당 반 아이들과 부 혹은 모들이 모인 그 자리에서 자녀와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 집은 우리밖에 없었다. 딸애와 우리말로 얘기하는 걸 옆에서 보던 한 엄마가 말했다. « 어머, 한국애처럼 한국어를 하네 ! 한국말을 저렇게 잘 하는 애가 왜 어학당에 있어요? » 실은 나도 놀랐다. 부모 중 적어도 한 명은 한국인인 집에서 한국어를 쓰지 않고 어떻게 아이가 1주일에 4시간 밖에 안되는 수업을 통해 한글을 배우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걸까? 외지에 나와 살면서 아이가 한국말을 하기를 바라면 부/모가 한국어로 대화를 유도하는게 당연한게 아닌가? 프랑스에서 아이가 1주일에 4시간 밖에 안되는 수업을 통해 배운 한글을 집에서조차 쓰지 않으면 어디서 쓰라고? 언어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의사소통의 수단이잖은가말이다.
설 잔치가 끝난 뒤, 한글학교에 반을 바꿀 수 있겠냐고 의뢰드렸다. 내가 학기 초에 아이의 한국어 실력을 과소평가한 것 같다고, 2월 방학에 한국에 갔다오면 아이의 한국말이 부쩍 늘텐데 프랑스에 돌아와 아이가 어학당 수업을 지루해하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평소에도 숙제를 꼬박꼬박 해가는데 내가 시켜서 하는게 아니라 아이가 먼저 숙제를 들고 내게 올 정도로 적극적이다, 내가 아이에게 가르친 한국어 동요들이 있기 때문에 반을 바꾸어도 아이가 어렵지않게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으니 좀더 어려운 반으로 반을 옮길 수 있겠느냐고. 무엇보다, 어학당에 친구가 있었다면 반을 바꾸려하지 않았을꺼다. 하지만 ‘너무~나’ 얌전했~기에~~ ㅠㅠ
교사회의가 몇 주 걸릴 줄 알았는데 바로 다음 주에 토끼반 청강을 해보라며 학교측에서 배려를 해주셨다. 나이대는 똑같지만 쓰기숙제가 많고 아이든 선생님이든 불어를 한 마디도 쓰지 않는 토끼반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면서 토끼반 선생님의 판단과 아이의 반응이 궁금했다.
« 저희 반이 사실 정원이 넘어서 다른 반 아이들을 안 받고 있어요. 오늘 다른 반 아이들 두 명이 저희 반에서 청강을 했는데, 한 아이는 기존 반으로 돌려보낼꺼고, 따님은 토끼반에 있어야되는게 맞아요. 토끼반에 있어야돼요. »
한글쓰기 진도는 어학당과 토끼반이 같았지만, 쓰기숙제는 2배가 늘었다. 그래도 딸애는 재밌다고 한다. 아직 복모음, 받침 등을 다 배우지 않았지만 1년동안 학교에서 배운 것만큼은 쓰기도 곧잘하고 책이나 인터넷 화면 상에서 더듬더듬 아는 글자를 찾아읽기도 한다. 유아학교에서 알파벳을 배우고 있어서 헤깔릴까봐 한글을 가르칠 엄두를 못내고 있었는데 한글학교에서 가르쳐주시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물론 아이가 능숙하게 하는 언어는 불어다. 한국말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 엄마인 나하고 얘기할 때 외에는 한국말을 쓸 일이 없는 아이가 이만큼 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대견한 지 모른다. 게다가 한글학교에서 하는 받아쓰기도 잘하고 글씨도 예쁘게 쓰고. 오늘도 시어머님이 '이제 초등학생이 되면 학교에서 (불어로) 읽는걸 배울텐데 한글학교까지 가서 한글 읽는걸 동시에 배우려면 애가 많이 힘들겠구나.' 하시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딸애가 '아니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하니 얼마나 기특하던지.
아, 여기까지 이렇게 쓰고나니 자화자찬이구나. 타지에서 한국어를 잘 교육시키는 비법 등을 쓰자니 얼굴이 간지럽겠고나. 아직은 아이도 어리고, 무엇보다 궁금해할 사람도 없을텐데. 오늘은 요기까지만 쓰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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